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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부산과 부산진의 땅 유래

부산과 부산진의 땅 유래

소개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1454)」 등에 우리 고장이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81년(단종 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산(지금의 증산)의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도 하여 그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쓰고 있다.

부산진이라는 명칭은 1936년 4월 1일 부산부에 부산진출장소를 설치하면서 부산진구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아마 부산진성이 부산진출장소 안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서면(西面)의 역사와 유래

서면(西面)의 역사와 유래

소개 옛 행정구역이었던 동래부 서면(西面)이라는 명칭을 구전으로 사용되면서 굳혀진 지명이 된 것이다.

서면(西面)은 현재 부산의 중심 상권을 형성하고 있는 교통·산업·유통·금융 등의 중심지라 할 수 있을 만큼 번화한 곳이다. 이곳은 행정상으로 부산진구 부전동에 속하여 있다.

서면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동래부(군)에 속하는 면으로『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가 7개면(읍내면, 동면, 남촌면, 서면, 북면, 사천면, 동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서면에는 11리(산저리, 여고리, 석사리, 대조리, 거벌리, 초읍리, 양정리, 연지리, 범전리, 전포리, 만덕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4년 간행된『경상도동래군가호안』에는 서면이 서상면과 서하면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서면이라 불리는 지역은 서하면의 부전리 일대로서 서상면·서하면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조선시대『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동평면 부현리(釜峴里)에 속하였다. 부현은 지금의 부암고개로 추정된다. 부전동은 부현리 중에서도 범전리와 전포리에 인접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1936년 시·군의 구획정리 때 부전동이란 이름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행정구역으로는 부산진구 부전동이지만 옛 행정구역이었던 동래부 서면(西面)이라는 명칭을 구전으로 사용되면서 굳혀진 지명이 된 것이다.

범천동(凡川洞)

범천동(凡川洞)

소개 범천은 증산(甑山)에 인접한 산들이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서식하였는데, 호랑이가 이 계곡에서 자주 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범천(凡川)은 오늘날의 자성대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강으로 동천(東川)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 강을 풍만강(楓滿江)․보만강(寶滿江)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풍만(豊滿)이라는 음이 변하여 생긴 이름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 동천을 범천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범천의 물줄기가 원래 자성대의 서쪽으로 흘러 바다에 유입되었는데, 자성대 부근의 매축 때 두 시내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동천이란 부산진성의 지성(支成)인 자성대 쪽에서 볼 때 성의 동편을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범천은 증산(甑山)에 인접한 산들이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울창하여 호랑이가 서식하였는데, 호랑이가 이 계곡에서 자주 출몰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따라서 범천은 한자식으로 호천(虎川)이라고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범천동이라는 동명은 범내(凡川)에서 유래되어 범내골을 중심으로 그 인근의 지역을 지칭하는 동명이 되었다.

1957년 구제실시로 동구에 편입되었다가, 1959년 시조례에 의해 동구 범일4동을 부산진구에 편입시키면서 범천1,2,3동으로 개칭하였다. 1966년 범천2동이 범천2,4동으로 분동 되었고, 1975년 남구의 신설로 범천3동은 남구에 편입되었다가, 1982년 문현5동에 편입되었다.

개금동(開琴洞)

개금동(開琴洞)

소개 이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 하여 개금이라 했다고 한다.

개금동(開琴洞)의 조선시대 행정명은 와요리(瓦要里)라 칭하다가 1904년 개금리라 칭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야리와 상대하여 경부철도 건너 북쪽에 있는 마을을 개금동이라 하였다.

이곳 고로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마을의 모양이 꼭 거문고가 길게 늘어져 있는 형상이라 하여 개금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토착지를 등지고 하염없이 피난길을 헤매던 어느 날 푸른 산림이 우거지고 맑은 냇물이 흐르는 아늑한 계곡이 뻗어 있는 이곳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가야금 소리를 듣고, 바로 이곳이 장차 평화의 뿌리가 뻗어날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되어 전란의 시름을 달래가면서 처음으로 마음놓고 거문고로 한 곡조를 타고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거문고를 말미암아 이곳에 살게 되었으므로 개금이란 지명이 붙었다고 한다.

1959년 가야동에 흡수되었다가, 1963년 가야동에서 분동 되었고, 1975년 인구의 증가로 개금1,2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1976년 개금1동에서 개금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야동(伽倻洞)

가야동(伽倻洞)

소개 가야리란 명칭은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가야동(伽倻洞)의 유래는 『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가야리는 동평면에 속한 지역으로 관문에서 2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라는 어휘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 학계에서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으나,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6가야의 가야를 의미하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옛날에는 지금의 고관, 즉 수정동으로부터 감고개를 넘어 가야동으로 왕래하였던 까닭에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되었다. 가야리란 명칭은 이 감고개 아래의 마을이란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1904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동평면과 단절되고 대신 서면의 가야리로 되었다. 1959년 개금동을 흡수하였다가, 1963년 다시 가야동과 개금동으로 분동되었다. 1970년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가야1,2동으로 분동 되었다가, 1979년 가야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감동(堂甘洞)

당감동(堂甘洞)

소개 현재의 당감천을 옛날에는 감물내·감물천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하며, 당리는 마을에 오래된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감동(堂甘洞)은 금정산의 주맥인 백양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록에 위치하여 있으며, 삼국시대의 동평현의 치소(治所)로 현재까지 동평현성이 남아있다.

당감동은 『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이는 동평면의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의 두 마을을 합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당감리라고 고쳐 부르게 됨으로서 생긴 동의 이름이다.

오늘날 당감동의 고무나무골에 수령이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이 있었는데, 이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동으로 직선을 그어 북쪽은 과거의 당리였고, 남쪽은 감물리였다고 한다. 당리라 한 것은 마을에 오래된 당집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순조 25년(1825)에 세운 영숙사라는 신당이 남아있다. 감물 리가 변하여 감물이 되었다는 설과 신이라는 뜻의 검물내(神川神水)라는 설이 있다.

이로 견주어 볼 때 감물내는 부산천을 의미하는 고음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낳게 한다.

당감동은 1914년 군면제 실시이후 당감동이라는 명칭을 사용되어오다가 1951년 당감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70년 당감1동에서 동평동이 분동 되었다. 1979년 당감1동에서 당감3동이 분동 되었고, 동평동이 당감4동으로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부암동(釜岩洞)

부암동(釜岩洞)

소개 부암동은 하천 주변에 구릉과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부암동(釜岩洞)은 부전동과 같이 조선시대에는 동평면 부현리에 속하였다.

동천의 상류인 백양산에서 발원하는 감물내를 중심으로 옛 고대리(古代里)에서 지금의 개성중학교의 언덕바지 산인 통칭 백양산 앞의 지역을 말한다.

감물내가 시작되는 곳은 조선시대 지명으로 당리이고, 하천이 넓어지기 시작한 곳이 감물리이며, 그 아래 지역을 고대리(古代里,古垈里)라 하였다. 감물내의 고대리 아래지역을 모두 부현리(釜峴里)라 하였는데. 이 부현리가 오늘의 부암동과 부전동으로 분리되었다.

부전동은 감물내의 동쪽 중 전포,범전의 평지에 붙여진 이름인데 비하여, 부암동은 내 주변의 구릉, 바위동산이 흩어져 있어 바위 암(岩)자가 붙여진 것이다.

1979년 시조례에 의해 부암1,2동으로 분동 되었다가,1982년 동평2동을 부암3동으로 행정명칭을 개편하였으며, 1998년 부암2동을 부암1동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포동(田浦洞)

전포동(田浦洞)

소개 동명의 유래는 황령산 아래 산자락에 마을과 논밭이 있었는데, 위치가 갯가이기 때문에 밭개라고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해서 전포리(田浦里)라고 하였다.

서면의 동천이 지금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흘러 바다로 들고 있다. 그러나 먼 옛날로 올라 갈수록 동천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자리는 서면의 북쪽인 육지쪽으로 올라온 자리였다.

말하자면 바다가 지금의 서면의 육지 깊숙이 들어서 있었는데 홍수 때면 서면 주위의 산에서 쏟아지는 물이 토사를 실어내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 갔다. 그렇게 메워진 자리가 갯가가 되고 논밭이 돼 간 것이다. 그 논밭으로는 벼와 보리, 채소들이 재배되었다.

지금은 전포동의 평지는 시가지가 돼 있지만 그때는 갯가의 밭인 밭개였다. 그 밭개가 밭 전(田) 갯 포(浦)의 전포리가 된 것이다.

1949년 전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인구 증가로 전포1동은 전포1,3동으로 분동 되었고, 1975년 전포2동은 전포2,4동으로 분동 되었으며, 1998년 전포4동을 전포2동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정동(楊亭洞)

양정동(楊亭洞)

소개 이 지역의 옛 어른들에 의하면, 양정본동 일대에는 수양버들의 실같은 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곳을 버들 양(楊)으로 개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양정동(楊亭洞)은 『동래부지(1740)』산천조에는 황령산 아래에서 화지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양정동은 『동래부지(1740)』에는 양정리(羊亭里)라 하였다.
양정(羊亭)이란 정자는 고적조나 루정(樓亭)조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자(亭子)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 지역의 고로들에 의하면, 양정본동 일대에는 수양버들의 실같은 가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곳을 버들 양(楊)으로 개칭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또 양정은 양지골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양정동에서 황령산을 바라보면 세 갈래 능선이 갈라져 나가고 있는데, 왼쪽은 당산능선, 중간은 평전(平田)능선, 우측은 취병장(吹兵場)능선이 뻗어 내리고 있다. 왼쪽 당산능선 아래쪽에 양지골 골짜기가 있다.

양지는 음지의 응달에 비하여 양달이라 하여 햇빛이 많이 드는 땅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양달은 양지의 음이 높아 한자의 양(羊)이라 표기되고 지(地)는 정자골(亭子谷)이 정자꼴로 읽히는 것으로 보아 정(亭)으로 된 것으로 풀이된다.

1970년 양정1,2동으로 분동하고, 1979년 양정1동을 양정1,3동으로, 양정2동을 양정2,4동으로 분동 되었으며,1998년 양정3동을 양정1동에, 양정4동을 양정2동에 통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읍동(草邑洞)

초읍동(草邑洞)

소개 동평현의 치소(治所)가 지금의 당감동 부근이었는데 고려후기 이후 빈번한 왜구들의 침입으로 동평현이 피폐해지자 천연의 요새인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이란 뜻에서 새터, 즉 초읍으로 불렸던 것으로 풀이된다.

초읍동(草邑洞)은 연지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금정산의 남북으로 통하는 요충지로 북쪽으로 금용산을 등지고, 남으로는 연지를 지나 부사평야로, 동으로는 화지산이 서쪽으로 달려가는 형상의 작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로는 산(쇠미산)의 산맥이 뻗어있어 천연의 성벽을 이루는 분지이다.

이곳의 동의 명칭이 초읍으로 된 연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동평현이 생긴 후 읍의 치소(治所)를 물색하기 위해 명사들이 초읍동에 들러 보았는데, 산의 지세가 좋고 지리가 음양에 맞아 이곳을 우선 읍의 치소(治所)로 선정해 놓고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나하여 현 금정구의 구두동으로 가보니 역시 산세가 좋아 두고 보자한 후 현 동래성에 들렀더니 동으로는 학소대와 남으로는 대조포란형(大鳥抱卵形)이 서울 장안의 산세와 같으므로 이곳을 읍지로 정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먼저 초한 곳이란 뜻에서 초읍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는 호사가들의 일담에 지나지 않고 실제는 새터가 원래의 고을 이름인 것으로 파악된다.

초읍은 초량을 '새뛰'라 부르는 것과 같이 초는 새로 읽히며 읍은 량.탁.벌.성 등의 터로 읽혀 '새터'로 불릴 수 있다. 새터는 새로운 터전, 새로운 자리라는 뜻이다.
즉, 동평현의 치소(治所)가 피폐해지자 천연의 요새인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이란 뜻에서 새터 즉 초읍으로 불렀던 것으로 풀이된다.

초읍동은 조선후기 동래부 서면 초읍리에 속하였고, 그 후 동래군으로 편제되었다.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42년 연지동과 함께 성지동으로 통합되었다가, 1963년 초읍동과 연지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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